세계 여자권투 4개 타이틀을 석권한 작은 거인 김주희 선수. 권투글러브를 벗고 강연대 위에 섰습니다. 4-50대인 청중에게 들려줄 강연 주제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

<녹취>김주희(여자권투 4대 기구 세계 챔피언) : “제가 솔직히 스물다섯 살짜리 어린 나이에 와서 무슨 인생을 논하러 오고, 그런 거에 대해서 얘기한다는 거 건방진 얘기고요...”

딸 뻘인 나이에 인생에 대해 얘기를 하면 무슨 얘길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풀어내는 그녀의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습니다.

<녹취> “사실 86년생인 저나 친구들이 86년생 또래 90년생 가까운 또래들이 쌀이 없어서 굶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저는 이렇게 보시면 잘 보이실지 모르겠지만 코도 한 두세 번 부러지고 손도 분쇄골절되고 그리고 여기도 열여덟 바늘 꼬맨 거 상처도 있고, 지금 이렇게 많이 티가 안나는데, 뭐 정말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에요. 안 아픈 데를 얘기하는 게 빠르죠. 너 피 검사좀 하고 가라. 그래서 피 검사를 했죠. 정형외과에서. 근데, 일반인의 1/4 수치. 임산부의 1/3 수치. 그런 수치가 나온 거에요. 헤모글로빈이.”

어려운 환경을 딛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그녀의 이야기에 청중은 어느새 몰입합니다.

<녹취> “따님도 권투를 하시냐고 기자들이 물어보니까, “내 딸이면 안 시키죠” 이러시는거에요, 농담으로. 아 관장님, 언제는 딸 같다고 하시더니?”

두 시간에 걸친 첫 강연을 원고 한 쪽 없이 좌중을 울렸다 웃기며 막힘없이 마쳤습니다.

여자 권투 세계 챔피언 김주희 선수의 강연이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스물다섯 살, 아직 인생을 논하기에는 다소 이른 그녀의 인생 이야기가 어떤 까닭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는 걸까요?

링 위에서 투혼을 불사르는 권투선수가 강사가 돼 전하는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저녁 6시, 어김없이 김주희 선수가 체육관에 들어옵니다.

<녹취> “안녕하세요.”

<녹취> “응, 날씨가 추워졌어”

<녹취> “네, 추워졌어요.”

때마침 열렸던 필리핀의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의 8체급 석권 성공 소식이 그녀를 맞이합니다.

<녹취>“파퀴아오가 이겼더라. 여기 봐봐.” (이겼어요?) 응. 대단해. (도전해 가지고요?) 응.”

경기 결과도 관심사지만, 구름처럼 몰려든 관중들의 권투 열기에 마음이 더 쏠립니다.

<녹취> “사람 좀 봐. 장난 아니다. 와”

<녹취> “우리나라 2002년 월드컵 때 같지”

<녹취> “네. 진짜, 최고다 최고”

<녹취> “400억 받았대”

<녹취> “4백억이요? 와... 4백만 원이 아니고 4백억...”

일방적으로 맞았다는 패배 선수 얘기도 남 일 같지 않습니다.

<녹취> “마가리토 입장에선요, 아주 정말 심하게 부상 입어도요, 봐준다는 느낌을 자기는 알고 있잖아요.”

<녹취> “알고 있지.”

<녹취> “그게 자존심이 상하잖아요.”

링에 서본 사람만이 패배자의 아픔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석 달 전, 김주희 선수는 4대기구 통합 챔피언 벨트를 놓고일전을 벌였습니다. 상대는 최근 상승세를 타고 있는 필리핀의 주젯 나가와 선수. 경기는 치열했습니다.

<녹취> “라이트 안면 치고 들어가는 김주희입니다. 김주희 안면 쪽을 조심해야겠어요.”

난타가 오가는 접전 속에 경기의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아 김주희 선수의 눈 주위가 부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녹취> “눈 밑 부분이 많이 부어있는 김주희 선수인데...광대뼈 부위가 지금 상당히 부어올랐거든요. 경기하는 데 아무래도 지장이 있을 거 같은데요...”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는 점점 커졌습니다.

<녹취> “아 지금 시야가 확보가 잘 안되거든요. 김주희 선수. 정말 정신력으로 싸우고 있는 거에요.”

하지만 얼굴이 만신창이가 될수록, 김주희 선수의 펀치는 더 침착하고 정확해졌습니다.

<녹취> “라이트 레프트 성공시키는 김주희! 연타 성공입니다. 턱이 돌아가는 주젯 나가와. 안면공격 성공입니다!”

무너질 것 같은 상황에서 집념으로 버텨낸, 이 경기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결과는 2대 0 판정승.

<인터뷰> 김주희(여자권투 4대 기구 세계 챔피언) : “기대하시고 이런 거보다 고전을 해서 조금 죄송하지만, 다음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녀의 삶도 치열한 경기만큼이나 위태로웠습니다. 외환 위기로 아버지가 직장을 잃고 어머니가 집을 나가면서 가족이 무너지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생계가 아닌 생존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인생이 고달팠던 13살 소녀에게 권투는 우연인 듯 필연으로 찾아왔습니다. 먼저 권투를 배웠던 언니 손에 이끌려 체육관을 찾게 된 게 계기였습니다.

<인터뷰>정문호(관장/ 거인체육관) : “김주희 언니가 와서 저한테 부탁을 하더라고요. 제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집을 먹고 사는데, 김주희 선수를 데리고 아르바이트 하는데, 가니까 사장님들이 싫어하고 그러시더라. 그러니까 관장님이 여기서 주희 운동 조금만 시키시고, 12시까지만 좀 보호를 해주십시요.”

<녹취> “여기 있으면 이렇게 빠지면 이 공간이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걸리는 거다. 이거지. 이렇게 걸리면 또 이거에 걸리는 거지. 그래서 이거에 이거에...”

권투 그리고 정 관장과의 만남은 포기 직전에 놓였던 김주희 선수의 삶을 도전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녀를 이끈 정 관장은 권투 지도자이자 때로는 아버지같은 존재입니다.

18살 때 김주희 선수는 그토록 원하던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랐습니다.

<인터뷰> 김주희(당시 18살) : “실감은 잘 안 나요. 내일 아침에 자고 일어났는데, 벨트가 그대로 있으면 제가 저하고 한 약속이 지켜진거고.”

세계 챔피언만 되면 나쁜 상황이 모두 해결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챔피언 벨트를 두 개 따고, 세 개를 따도, 달라지는 건 별로 없었습니다.

더 이상 권투가 인기 스포츠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스폰서가 끊기고 방어전조차 치를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어렵게 딴 챔피언 타이틀 2개는 그 탓에 허무하게도 그만 반납되고 말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가락 골수염으로 발가락 뼈를 일부 잃어 선수 생명도 위협받았습니다. 계속되는 시련에 김 선수는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권투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이 그녀를 강연대에 서게 했습니다.

<녹취> “권투가 잔인하다? 간혹, 그렇게 타격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배고픈 선수들만 하는 것이다, 가난한 운동이고 뭐, 어렵다. 자꾸 그렇게만 표현이 되는 것 같아서 얼마나 괜찮은 운동인가를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게 그게 가장 우선적인 이유였어요.”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 이후 강연 요청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녹취> “24일 날은 대기업이라든지 삼성이라든가 쌍용이라든가 동양 그룹.. 또 12월 달은 세방전지...”

훈련에 방해가 될까 걱정했는데, 자신에게도 좋은 효과를 줍니다.

<녹취> “저도 예전의 얘기, 제가 아주 데뷔 초년기의 얘기를 자꾸 함으로써 아, 이건 진짜 내 자신한테 오히려 도움이 되는구나, 자꾸 내 초심 초보였던, 아주 무명이었던 얘기부터 하게 됨으로써 나를 또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도 생겼고..”

김주희 선수가 두 번째 강연에 나섰습니다. 이번엔 대학생들 앞입니다.

<녹취> “그렇게 제가 울그락 불그락 한가요? (아니요.) 밖에 나가시면 소문좀 많이 내주시고요. 소문좀 많이 내주시고, 여성스럽다고 생각보다.”

같은 또래가 겪은 이야기라서 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녹취> “쌀이 없을 정도가 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아, 도둑질을 했어요. 배가 너무 고파서... 발가락을 잘라낸 다음부터 다시 부정적으로 바뀌고 이제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거의 어느 정도였나면요, 정신과 치료를 받았어요. 거의 막 우울증에 시달려서.”

이 여성 권투선수의 지난한 인생과 그것을 헤치며 살아온 도전적인 삶은 그 자체가 그대로 메시지가 됩니다.

<녹취> “항우울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못자요. 일주일동안 울고 막 살이 막 10kg 이상 빠지고 정말 그런 지경에 이르고 했는데 결국 저는 결론을 내린 것은, 선택은 도전이구나. 결국 도전을 해야겠구나.”

강연이 끝난 뒤, 김 선수를 위해 학생들이 깜짝 선물을 마련했습니다.

<녹취> “챔피언 축하 합니다. 사랑스런 김주희, 챔피언 축하합니다.”

마음 여린 챔피언은 그만 또 눈물을 보입니다.

<인터뷰> 김지선(삼육대학교 학생) : “요즘 청소년들이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이나 끈기가 좀 부족한 거 같아요. 그래서 이 강연을 들으면서 저 또한 느낀 게 무슨 일이든 끈기 있게 해나가는 거 그거 하나만으로도 최고가 될 수 있는 거 같습니다.”

사람들이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건 그녀의 인생 역정이 극적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만신창이가 됐으면서도 웃으면서 다음 도전을 준비하는 그녀의 자세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링 위에서 뿐 아니라 인생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녀의 모습은 쉽게 포기하고 체념하는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