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엔 승패가 없다. 단순히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협상을 한다면 더욱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 2차 세계대전도 1차 세계대전 승전국에만 유리하게 진행된 협상에서 비롯됐다. 협상에 불만을 품은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켜 승전국은 더욱 큰 경제 손실을 입었다.
필자가 운영하는 세계경영연구원(IGM) 협상스쿨에선 수많은 모의협상을 한다. 참여자들은 모의협상 때마다 자기 팀이 이겼는지 그 결과를 묻는다. 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는 협상의 본질에 대해 오해하고 있어서다.이겨야 한다는 생각은 협상을 승패가 있는 '씨름'처럼 보기 때문이다. '이긴다'란 말의 이면에는 상대방은 '진다'란 의미가 담겨 있다. 협상에서 상대방이 진다는 것은 상대방이 별로 이익을 못 보고, 이긴 내가 상당한 이익을 본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협상을 잘 하는 것이 마치 '상대방을 쥐어 짜서 나의 실속을 차리는 것'으로 착각하게 한다.
승전국들은 독일을 상대로 전쟁 피해배상을 요구하는 협상을 벌였다. 승전국들은 손해배상금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요구했다. 전쟁에 대한 손해배상뿐 아니라,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여유를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협상은 일방적으로 승전국의 요구대로 이뤄졌다. 이 협상은 결국 패전국 독일의 마음 속에 있는 한과 분노를 삭이게 했다. 전쟁이 끝나고 10여 년간 승전국들은 패전국들로부터 많은 배상금을 받아냈다. 그러나 독일은 20년이 지나도록 배상금을 다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경제 파탄에 이르게 됐다. 독일인들은 이런 경제적 어려움이 잔인하게 쥐어 짠 승전국에 있다고 했다.
결국 그런 원한은 승전국들을 향해 전쟁을 기도한 히틀러의 지지로 연결돼 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종전 협상에서 이긴 승전국들은 단기적으로 배상금 이익은 얻었지만 이어진 2차 세계대전의 피해는 1차 세계대전의 피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결국 협상에서는이겼지만 오히려 큰 손해를 봤다. 1차 세계대전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협상에서 진 쪽은 다음 기회에 꼭 복수할 목적으로 칼날을 갈 가능성이 크다. 내가 당한 만큼 돌려주고 싶어하는 것은 어찌보면 인지상정이다. 복수하지 않더라도 계약사항을 성의 없이 처리해 상대편에게 피해를주기도 한다. 상대방이 손해를 보면서도 이겼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요즘 유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어 온 국민의 근심이 깊어가고 있다. 국민들의 시름 속에 올해 초 그나마 주름살을 펴게 만드는 뉴스가 터졌다. 미국 기업인 테일러 에너지가 내놓은 멕시코만 유전을 석유공사와 삼성물산이 연합한 한국컨소시엄이 인수했다는 것이다. 이 유전은 우리나라가 인수한 유전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더욱이 경쟁자인 미국의 아파치와 스폰보다 낮은 가격에 입찰하고도 인수에 성공했다. 미국 테일러 에너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최고 가격을 받지 못했으니 손해를 봤다고 할 수 있고, 협상에서 졌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한국컨소시엄이 공략한 것은 테일러 에너지 CEO의 경영이념이었다. 작고한 패트릭 테일러가 설립한 테일러 에너지는 고학생을 위한 장학사업 등 많은 사회사업을 벌여 왔다.그의 부인이자 현재 CEO인 필리스 테일러는 남편의 유지를 이어받아 사회사업을 중시했다. 그런데 최근 자금의 어려움으로 테일러 에너지를 팔게 된것이다. 이런 정보를 확보한 한국컨소시엄은 헙상 프레젠테이션에 필리스 회장의 남편인 페이트 테일러의 사회사업공적을 넣었다. 이 내용이 발표되자 회장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한다. 제안서에는 인수 이후에도 사회사업을 지속한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넣겠다고 했다. 한국컨소시엄의 인수가 결정됐을 때 필리스 테일러 회장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매각 기념식을 직접 진행하기도 했다. 테일러 에너지가 한국컨소시엄에 매각을 결정했다는것은 적어도 협상에서 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경제적 손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기에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경제적 이익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주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때로는 경제적 이익보다 증요한 다른 가치나 본능이 협상 참가자의 만족도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칠 때도 있다. 필리스 회장은 높은 가격보다는 사회사업을 더욱 선호했던 것이다. 협상에선 상대방에게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다른 주관적 만족을 줘야 한다. 그것은 상대방의 신념일 수도 있고 정의감일 수도 있고 다른 가치일 수도 있다. 바로 그것을 찾아서 만족시켜 줄 때. 그 사람은 당신에게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주고서도 행복한 마음으로 협상에서 물러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윈윈(win-win) 협상을 만드는 비결이다.
